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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설교 블러그 - 샘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설교

다음 세대가 읽도록 주님께서 하신 일을 기록하여라. 아직 창조되지 않은 백성이, 그것을 읽고 주님을 찬양하도록 하여라.(시 1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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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생명으로 오신 구주
요한복음1:2-5
2017년 12월 17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그리스도교에서는 크리스마스 전 4주간 ‘예수의 성탄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력에서 말한 절기이다. 예수의 탄생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맞는 교회력의 절기이며 이를 대림시기, 대강절, 강림절로도 부른다. 그 뜻은 ‘오다’(Adventus)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하였다. 교회력이 대림절로 시작하기 때문에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뜻도 있음을 부언한다. (대림 첫째 주일은 11월27-12월3일 사이의 주일)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가신지도 2000년이 되셨다. 예수께서 마구간에 태어나서 빈 구유 바닥에 눕혀 지내심을 안다. 마구간의 식구들로 상징되는 온 생물은 물론 구유로 상징되는 마구간 식구들에게 말없이 밑바닥이 되어 준 존재하는 모든 빛과 생명에게 까지 하느님이 오시는 그 까닭이 어디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한다. 당시 낮은 이들로 여긴 들에 목동들에게 먼저 인사를 나누듯이 세상의 낮고 천한 밑바닥 인생들 ‘ 땅의 백성(암 하 아레츠)들과 함께 즐겨 먹고 마시기도 함을 알게 한다. 이는 맨바닥, 땅 바닥에 누워 오심의 의미를 알게 한다. 이 나눔의 완성으로 자기 자신을 내어 주셔서 삶을 공유하신다. 빛과 생명은 생물로 만물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생명의 특성은 땅이 무질서하게 혼란한 상태로 되려는 경향이 있지만 빛과 생명은 정돈되고 조직화 되려는 경향이 있고 생명은 환경에서 에너지를 얻어 성장과 자기 유지에 이용하려 한다. 그리고 빛과 생명은 자신의 유전 암호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려고 한다. 그리고 환경에 적응하여 이로운 방향으로 가려한다. 그리고 항상성이라는 안정된 정상상태를 유지하려하고 한다는 점에 유의한다. 이러한 생명의 특성을 고찰하면 인간 사회의 삶에서 삶의 구도자가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지를 알게 한다. 이는 빛과 생명으로 오셔서 구원의 생명의 모습을 친히 견디어 가게 하신다. 그리하여 성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 표현엔 인간의 본질, 곧 그의 근원과 성질과 운명으로 한 빛과 생명을 가지고 삶을 영위해 나타나고 있다. 이 말씀은 인간이 그 생명을 이어 받은 것이요 스스로 존재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생명을 소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성서로 보면 사람으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인 인간은 빛과 생명이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 하는 자”로 창조된 것을 믿음으로 감당하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스스로 생명을 유지 할 수 없으므로 에덴동산에 생명나무를 두신다고 한다 (창 2:9). 즉 에너지 ( Energy) 공급원을 두신 것이다. 이 나무의 열매를 따 먹어야 생명을 이어 갈 수 있다는 말은 이미 아담 하와가 하나님을 의존해야 함을 인정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 생명나무는 인간의 생명을 영속시키는 힘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다시 말하면 그 열매를 먹고 있는 한 죽지 않을 것을 믿는 것이다. 인간은 하등의 피조물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특성과 기능과 능력들, 곧 이성, 선택의 능력, 지능 등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를 감당하게 한다. 동물들에 비하여 인간들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는 이러한 특징들은 그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속성은 하나님의 뜻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오늘의 우리의 이 시대에서의 삶은 '빛'과 "생명의 삶"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력으로 될 수 있는 그 이상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속에 들어올 때 이루어진다. 그때서야 우리는 그분이 원하시고 작정하신 모습대로 만들어진다. 충만하고 완전하고 새로운 삶의 탄생은 쉽사리 감추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신앙생활 속에 있는 사람들은 영원속의 참된 재탄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빛이 주어져 생명이 되는 신앙이 된다. 이제 두 가지의 상징적인 비유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죄악과 무지가 산더미처럼 쌓여 썩어가고 있는 인류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그들의 삶과 교훈을 통해서 썩어져 가는 인류를 지식과 은총으로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런데 만약 그들이 목적에 합당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맛을 잃은 소금이 되고 마는 것이다. 빛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들은 밝히 드러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빛이 어둠에 가득한 이 세상과 이웃에게 비추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우리들은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을 추구함으로서 어둠에 놓인 세상 사람들이 완전한 빛을 발견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빛 된 것들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한편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한 가지 사실은 우리가 이 빛의 근원 곧 발광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빛의 근원은 오직 한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다만 그 빛을 받아 세상에 그대로 반영해 주는 반사체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나 빛의 근원이신 그리스도께로 우리의 마음과 시선을 집중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드리는 형식화된 종교적 예배의 가치는 무엇인가? 거의 수천 년 가까이 된 답변들이 여러 말씀 속에 있다. 포로 된 자들이 그렇게 빨리 잊어버려서는 안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들이 무엇인가로 결말을 짓는다. 주린 자에게 식물을 나눠주고 유리하는 빈민을 집으로 들이며 벗은 자를 입히며 멍에의 줄을 끊어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들이다. 이 전환은 모세의 법과는 다른 방법으로서의 기록한 법을 펼쳐 보인다. 일상생활에서의 빛과 생명에 대한 이야기는 율법의 관계성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빛은 은혜롭게도 가난하고 멸시받고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복음의 약속을 가져다주며 이 땅에 내려와 기본적인 욕구들을 만나준다. 빛과 생명이 사람들을 통로로 삼아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넘치게 된다. 하나님은 좋은 재료를 갖고 계신다. 우리는 그 재료들을 잘 분배 받도록 소명 받고 있다. 이것이야 말로 제대로 된 방향과 차원에서 역사하는 피라미드적인 계획이다. 이렇게 신앙과 삶의 중심은 언제나 실제적인 것들과 계속 관계하는 것이었다. 오늘의 우리의 이 시대에서의 임무는 빛과 생명을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력으로 될 수 있는 그 이상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속에 들어올 때 이루어진다. 그때서야 우리는 그분이 원하시고 작정하신 모습대로 만들어진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쉽사리 감추어지지 않는다. 믿음 속에 있는 사람들은 영원속의 참된 재탄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빛과 생명”이 될 것이다.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

예수 삶의 길
누가복음9:57-58, 마태복음8:19-20
2017년 12월 10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한글개역성경에 누가복음의 9장 본 문에서 주님의 '제자 됨'의 길을 생각해 본다. 누가복음 전체의 '제자'라는 말이 누가복음 9장에만 11번 나온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흔히 제자 됨으로 사역이나 목회를 위한 수단으로 생활하는 제자가 아니라 제자 됨의 삶의 길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본문 9장을 살피게 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삶은 주로 3권의 공관복음서에서 주로 나타난 그 제자가 누구인가를 알게 한다. 제자 됨의 선한 의도나 받은 영광보다 더 귀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살피게 한다. 제자 됨의 생활은 문화생활의 일부나 시간이 남으면 사역하는 생활이 아니라 제자 됨은 나이(연령) 여하를 막론하고 예수님의 삶이나 하느님의 나라 일을 위해 최우선 순위에 두는 그런 삶으로 생활하는 것임을 알게 한다. 예수께서 친히 보여 주시듯이 들짐승이나 날것들보다 못한 노숙자 신세가 되는 길도 열어 보이신다. 57절- 58절에서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심은 제자의 사역(使役) 길을 위해 거처도 없는 생활수단도 없는 그의 삶을 확실히 보여 주심에 인지(認知)하게 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신다. 예수님의 삶은 가르치기 위한 삶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삶의 스승이요 그 분이 내안에 사심을 사실로 인정하고 순간마다 자기를 인도하시고 해야 할 바를 깨닫게 하신다. 예컨대 바로 그 순간 부싯돌에 부딪치듯이 섬광과 같이 빛나는 광채를 본다. 이는 생명의 삶은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의 자아, 그분의 인격으로 일상생활을 영위하게 하신다. 그리하여 디트리히 본 회퍼는 삶을 말하면서 항상 "그분께서 제 안에 계심을 느낍니다. 그분은 순간마다 저를 인도하시고 제가 말하거나 행해야 할 바를 알려주십니다"라고 한다. 아직도 우리 인간들은 생명에 대하여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생명은 삶의 명령을 받아 자기의 삶을 책임 질 줄을 안다. 하나님의 창조는 살아있는 인간을 통하여서 삶을 사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한다. 이 삶의 에너지는 창조 그 자체에 의해서 의지하고 이 삶 조각의 에너지는 우주 에너지에 의해 흡수된다. 창조는 인간에게 어떤 명령도 요구하지 않고 그들의 삶에서 그들의 모양새에서 그의 말씀과 질서를 통해서 창조의 삶의 목적을 갖게 한다. 이 창조는 어떤 모습으로 한정되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삶의 모습은 자유롭고 기쁘게 삶을 살아간다. 생명은 여타 생명과의 서로 생명작용에 의한 고유한 살림살이가 가능한 개체물질의 총칭으로 정의하고 생명은 모두가 창조적인 삶을 스스로 꾸려 갈 수 있는 무한하고 신비로운 능력인 영 혹은 영성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하여 모든 생명을 대할 때는 목적으로 상관하여야 하지 수단으로 대해서는 아니 된다. 생명은 서로 간에 사랑에 의한 나눔으로 모두가 평등한 생명공동체임을 알아야 한다. 모든 생명들이 추구하는 보편타당한 진리는 '아름다운 살림살이'이다. 이 '살림살이'는 생명의 살림을 조화롭고 건강하게 꾸리는 모습, 그 모양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자기부인은 정상적인 생명으로 생명공동체적 삶을 사는 것이다. 이는 생명공동체적 삶을 지향하는 배려가 전제되는 살림의 생명이다. 이 삶은 자신의 삶을 거부하고 자신의 욕망에만 집착한 암적 존재로서 이를 죽임의 생명을 말하게 한다. 
베드로는 당시에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였고, 그리하여 수제자까지 되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잘못된 메시아관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을 말렸고 그리하여 사단과 관련된 책망까지 받게 되었다. 예수님은 육체의 구원자가 아니라 전인의 구원자였고, 이를 위하여 혼연히 먼저 죽음의 길을 가셨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치르게 하시는 시험은 예수님께서 행하심으로 가르치신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시기 위해 오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았다.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고통당하시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그분께서 당하실 일에 반대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꾸짖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죽임을 당하시려고 오셨다는 것과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그 자신에 대해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음에 주목한다. 그래서 모든 생명은 생명공동체에 의한 공유적이거나 사랑을 바탕으로 배려, 나눔에 의한 상호의존적 관계 속에 공존 공생하는 삶을 알게 한다. 사람이 향유하는 모든 능력은 이렇게 상대적인 것이지 결코 절대적인 것은 없다.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세상의 어느 무엇도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것은 없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인간은 시한부적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인간의 삶은 하루 세끼 먹고 계절을 따라 옷 입고 하루 잠자는 것으로 세월을 사는 것이 인생살이이다. 이 인생에게 만물의 영장이라는 이라는 말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는 창조자의 의도를 따라 사는 삶을 말하고 하나님과의 영적교제를 가져야 하는 당위적인 믿음을 갖게 한다. 흙으로 빚은 질그릇 같은 인생살이는 하나님의 영을 지닌 존재로 사람다운 삶으로 삶을 살아야 함을 알게 한다. 이는 삶의 목적이요 삶의 가치임을 알게 한다. 루터가 그의 <로마서 주석> 서문에 쓴 말은 여전히 신앙과 삶에 귀감이 된다. 이신득의 율법의 행위가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는 말이다. 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내용이다. 사람이란 남과 함께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을 바로 깨닫고, 옳게 살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다. 성서는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예수 삶의 길”이 무엇인가를 삶으로 태어나 오심의 뜻을 신앙하게 한다.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

구주 예수를 만남
시편56:13, 요한복음1:14,6:53,히브리서 11:1
2017년 12월 3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생명으로 태어나는 하느님의 구원의 행위이며 출발점과 시작이 되는 역사적 사건이며 하느님의 몸을 힘입은 성육신의 오심을 의미한다. 이를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확신한다. 이는 여기에 오시는 분의 기다림에서 맞이하는 것은 한 삶의 역사적 사건이며 삶의 현장에 말씀으로 영으로 새롭게 임재 하심에 대한 경의이며 ‘구주 예수로 오심’의 의미는 말씀이 육신으로 오심의 의미를 알게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창조하심을 입은 생명들에게 하느님의 구원행위를 이루어 가시는 삶의 현장에 중요함을 알게 하고 비인간화의 역사에 오시는 생명의 말씀이 오심이기에 삶의 주님을 맞는 경축만이 아니라 구원함을 받는 삶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기에 태어나심의 경축에만 국한 한 것이 아니라 삶 전반에 따른 삶의 고백임을 알게 한다. 이 고백의 말씀 속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진리 가운데 만고불변의 법칙은 ‘생명’만이 생명을 생성시킬 수 있는 생명원인이 가능하다는 것에 믿음을 깨닫게 한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물질세계는 원래 선 했으나 인간들의 삶의 타산에서 망가지고 훼손되어 창조질서가 망가져 자연의 생태계의 변화가 생겨 온 세상은 오늘에 와서 오염된 생명으로 가득하게 됨을 알게 한다.
여기에 그리스도교만이 하느님의 창조질서 회복에서 생명의 고백신앙을 알게 한다. 이제 여기에 우리 인간은 모든 생명 관계에 관계를 가지고 하느님의 창조하신 그 뜻을 따라 섬기며 책임 있는 하느님의 말씀의 약속을 다하여 지켜가야 한다. “구주 예수로 오신 구세주께” 함께 기도하며 생명의 약속의 말씀을 순종하는 신앙고백으로 ‘구주 오심’의 날에 온전한 “크리스마스”가 되기를 기원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 했다. 지금도 미래에 속한 소망이지만 그것을 현재 실상으로 갖고 있는 것같이 확실하게 지금 현재화하는 삶의 태도는 지금 아직 나타나 보이지 않지만 확실하게 현실화 하는 삶의 태도를 미음으로 극복하기를 기도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같이 그리스도인의 고백은 일반적인 생활태도라기 보다는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라는 삶의 믿음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컨대 ‘나’라는 인격이 그리스도라는 인격을 향해 신뢰와 존경으로 자기를 개방하는 결단이며 상대에게 자기를 개방하여 그가 나와 인격적 교제를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을 그리스도교에서는 말씀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믿음이란 그리스도와 나와의 정상적인 인격관계를 갖고 ‘나와 너’의 (I and Thou)인격적 관계이지 ‘나와 그것’(I and It)과의 관계가 아니다.
여기에 20세기 신학자 ‘마르틴 부버’의 (Ich und Du)는 ‘나와 너’ 관계를 말하면서 관계의 근본적이고 가장 순수한 형태는 사람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이며 이 관계는 인간관계의 전형이고 인간관계를 나-너 관계로 만들 수 있다고 한 점을 지적한다. 그런데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나-너’관계이지만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는 종종 ‘나-그것’과의 관계가 된다는 점에 유의한다. ‘나-그것’의 관계는 상대를 사고나 행동을 인격의 대상으로 다루게 된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다른 피조물과 사람의 관계는 때로는’나-그것의 영역에 가까이 다가 설 수 있고 그 관계 속으로 빠져 들 수 있음에 유의하게 한다. 흔히 사람들은 사람을 일컬어 가장 진보된 고등동물이라 한다. 지능이 높고 서서 걸으며 말과 물건을 만들거나 무슨 일을 하는 데 기구를 만들어 쓸 줄 아는 알고 사람의 됨됨이로 인간으로 행세하며 사람의 됨됨이로 세상에서 삶을 인격으로 살 줄 알기에 생사화복으로 그 삶이 덧없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성서의 말씀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않는 사람은 그 속에 생명이 없다”고 (요6:53) 하심에 주목한다. 이 사실을 들은 유대인들의 귀에는 거슬린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된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인간들의 삶에서 살과 피가 되게 하기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예수 삶의 세상의 삶의 마지막 이별 식탁에서 예수께서는 ‘이것은 내 살이다. 이것은 내 피이다’ 하는 성만찬의 상징적 예전의 의무가 무엇인가를 피력하신다. 이는 인간이 살아가는 삶에는 말씀을 먹고 그 말씀을 소화하여 그 생명으로 사는 인간의 참된 관계에서 믿음의 삶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나의 삶의 ‘구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은 삶을 구원하는 메시지임을 필히 알아야 한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크리스마스 케롤이 세상에 울려 퍼진다.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