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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설교 블러그 - 샘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설교

다음 세대가 읽도록 주님께서 하신 일을 기록하여라. 아직 창조되지 않은 백성이, 그것을 읽고 주님을 찬양하도록 하여라.(시 1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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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는 이유가 없다
레위기22:29,마태복음23:9, 요한복음1:14, 로마서8:15-17
2017년 10월 15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자연은 인간에게 이용 가능한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공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여기에 그리스도인에게​ 자연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갖게 한다. 하나님의 영이 자연 속에서​도​ ​활동하고 계심을 알게 한다. ​ 자연 과학자들이 '창발적 진화'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도 우리 신앙으로 보면 하나님의 '내재성'​의 입장을​ 알게 하여 '내재적 초월'을 자연으로 하여금 ​이를 ​보게 한다. ​흔히 ​가을을 단풍계절의 풍경만을 보는 관광객도 있지만 열매를 거두는 수확의 기쁨을 만끽하는 의미도 있다. 가을은 ​살아 익은 ​열매를 보게 ​하는 것이​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기능적, 기계적 가치​를​ 우선하는 세상이 되어 ​가면서 ​이러한 가치​로​ 우대받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테크놀로지의 이데올로기가 보편화되어 이러한 인식이 사회 전반에 깔려 있​음을 알게 한​다. ​예컨대 ​사람을 양육하는 인간교육​도​ 학교교육에서 배제된 채 그 교육은 기능적 인간을 양성하는 ​학교로 변신해 가고 있고​ 우리 사회의 모든 구조​가​ 인간미가 풍성한 사람보다는 공부 잘하는 지식기능사를 요구하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음을 보게 한​다. ​그리하여 ​기업에서도 성과를 올리는 관리자를 유능한 인재로 선호한다. 기업의 특성이 성과이기 때문이라지만 이는 단기적으로는 성과를 올릴 수는 있겠지만 기업 내의 분위기는 저하되는 현상을 보게 ​된​다. 이러한 기업은 기능적 인간을 더 선호하기 때문에 출세와 승진을 위해서는 수단방법도 개의(介意)치 않게 된다. 이러한 현상인 자본주의 사회는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가치를 우선하기 때문에 치열한 생존경쟁을 정당화로​ ​인식하고 살고 있다. 오늘의 자본주의 사회는 이러한 모든 것을 부(富)의 창출과 증식이라는 돈벌이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경제주의적 가치관이 되고 말았다. 이 돈벌이는 경쟁력, 효율성, 생산성 등을 적극 지지한다​고는 하지만​ 결국 본래의 경제이념을 상실하고 자유경쟁을 유도하여 삭막한 삶으로 생활을 이끄는 ​현상이 되고 만​다. 사실로 본래의 경제관 이해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이라 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함으로 이를 성사 시키는 것으로 경제를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눈을 감고 생각해 보면 ​'감사​'라​는 ​본래의 뜻은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은혜의 고마움​에 비롯된​다. 그리하여 ​'​감사의 마음​'​은 ​"​이유가 없​음"을 알게 한다. ​감사는 감사해야 할 이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감사는 사랑의 보답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천하 만물을 공간과 시간의 전체를 지으신 창조주이시​기에​ ​그리고 생명의 아버지이심의 그 까닭을 아는 것이다. 예컨대 인간의 부모와 자식 간의 사이에는 아무 이유나 조건이 아닌 사랑의 관계이듯이 사랑의 관계​인 것을 확인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그 관계의 나타남은 감사와 은혜뿐이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감사하는 마음은 항상 조건반사적인 태도이다. 그렇다고 동물처럼 동물이 그의 환경에 적응하려고 후천적으로 가진 반사작용과 같은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과 같은 그런 조건반사가 아니라 정녕코 감사는 고마운 마음을 나타내는 인사하는 마음이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죄 사함을 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십자가 은혜가 바로 그것 이치를 알게 한다. 이​는 곧 ​ ​'​은혜​'라​는 ​그 깊은 뜻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믿는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선물이다. 즉 회개할 때 모든 죄를 덮으시는 죄 사함의 은혜요 주 안에서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은혜이다. 여기에 대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의 태도로 사랑의 교제 속에서 범사에 대한 믿음의 인사(人事)가 있다. 인사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예의이며 은혜에 대한 감사한 마음으로 해야 할 마땅한 일인 것이다. 그리하여 감사는 사람끼리 관계를 갖는 생활에서 기본적인 인사가 된다. 이런 일을 감안하여 보면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감사의 인사가 없는 무심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우리 그리스도교의​ 창조론은 ​'​인간 중심주의가 아니라 하​느​님, 인간, 자연과의 생명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하면 인간 사이에 불신과 반목이 생기고 인간 사이의 관계​가​ 상실이 ​되면 ​자연을 황폐케 한다는 사실을 보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 땅이 인간에게 엉겅퀴와 들풀​들로​ 서로 엉키듯이 인간이 하는 노동이 저주받는 노동이 되게 하고 반면에 인간이 하​느​님이 창조하신 창조물을 보전하며 인간의 신뢰도가 창조질서를 회복​해 가​면 ​여기에 ​땅에서 강물이 흐르고 온갖 들판에서 과실이 맺는다는 것​으로​ 창조의 증언​으로 실증이 되어​ 이것이 성서의 증언이기도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맥추절 감사 절기를 지키는 것은 땅이 자연적으로 소출을 낸 것에 대한 감사이고 이것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셨다는 징표로 믿었던 ​그 믿음을 여기서 보게 된​다. 
​이제 ​자연은 인간에게 이용 가능한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하​느​님의 활동공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여기에 ​자연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갖게 한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인간이 '이성을 선물로 받은 존재'라는 중세기의 견해를 반대하​는 그 이유는​ ​'​인간의 존재와 그 구조나 성향, 능력들 중에서 하​느​님의 형상을 찾으려는 시도를 거절하였다​'​는 점에 주목하게 한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인격적 관계능력에 있다고 주장하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유를 가진 인격적 존재로서 하나님과 남녀 인간과 인격적으로 관계하며 교제할 수 있는 능력과 실존이 본질적이라고 생각하였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우리는 오늘날에 윤리 교육뿐만 아니라 교육의 목적 자체는 자아실현이라는 의미가 중요하다. 인간의 자아실현이 교육을 통하여 달성 하려는 인본주의 교육의 전통은 이미 그리스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하여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자들과 루소, 페스탈로치로 연결된다. 교육의 목표는 기계적인 사람이나 지식인을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전인(whole person)적 존재를 기르는 것이라 하였다. 전인적 사람들은 사랑하고 깊이 느끼며 그의 내적 자아를 확대하고 자아 교육의 과정을 계속하는 사람이다.​여기에 감사는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은혜의 고마움이다. 그리하여 감사의 마음은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는 감사는 감사해야 할 이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감사는 사랑의 보답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이 들어 잇는 온 공간과 시간의 전체를 지으신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믿어야 한다. 레컨데 인간의 부모와 자식 간의 사이에는 아무 이유나 조건이 아닌 사랑의 관계이듯이 사랑의 관계됨을 알아야한다. 그리하여 그 관계의 나타남은 감사와 은혜뿐이다. 그럼으로 감사하는 마음은 항상 조건반사적인 태도임을 알게 한다. 정녕코 감사는 고마운 마음을 나타내는 인사하는 마음인 것이다. 하느님의 은혜 가운데서 죄 사함을 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십자가 은혜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영을 살리고, 마음을 살리고, 몸을 살리고, 삶을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나라와 민족과 세​상을​ 살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믿는 자를 특별히 구별하셔서 은혜를 베푸신다. 바로 이 하나님의 은혜는 이유나 조건이 아니기에 "감사는 이유가 없다"이다. 이는 곧 우리의 영을 살리고, 마음을 살리고, 몸을 살리고, 삶을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나라와 민족과 세상을 살리는 것이다. 물 없는 고기는 살수 없다. 모든 인생은 이유 없는 감사로 삶의 열매를 거둔다.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

가을은 알게 하는가?
레위기22:29,마태복음23:9,요한복음1:14,로마서8:15-17
2017년 10월 8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가을은 ​알게 하는가?"​ ​를 ​보게 한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기능적, 기계적 가치가 우선하는 세상이 되어 여기에 따는 삶의 가치가 우대받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테크놀로지의 이데올로기가 보편화 되어 있는 우리의 현실을 알게 한다. 예컨대 사람을 양육하는 인간교육이 학교교육에서 배제된 채 그 교육은 기능적 인간을 양성하는 학교교육만이 한영을 받고 우리 사회의 모든 구조는 공부로 배움을 키우는 지식기능능력을 우선하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 기업도 성과를 올리는 관리자로 여기에 유능한 인재만을 우선하여 출세와 승진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에 눈을 모으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수단과 방법에 개의 않는 현상이 자본주의가 되면서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가치만을 위한 삶으로 우리의 삶은 치열한 생존경쟁으로 이를 정당화함에 주목하게 한다.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것을 부의 창출과 증식이라는 돈벌이의 관점에만 몰두하고 있다. 이러한 돈 벌이는 경쟁력, 효율성, 생산 등으로 유익한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세상을 다스리고 국민을 구제함으로 이루는 삶의 경제를 알아야 한다. 
여기에 대하여 성서신학은 "하느님의 형상"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즉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칼 바르트의 신학적 견해를 알​게​ 한다.​인간이 '이성을 선물로 받은 존재'라는 중세기의 견해를 반대하고 인간의 존재와 그 구조나 성향, 능력들 중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으려는 시도를 거절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인격적 관계능력에 있다고 주장하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유를 가진 인격적 존재로서 하나님과 남녀 인간과 인격적으로 관계하며 교제할 수 있는 능력과 실존이 본질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윤리 교육뿐만 아니라 교육의 목적 자체는 자아실현이라는 의미가 중요하다. 인간의 자아실현이 교육을 통하여 달성 하려는 인본주의 교육의 전통은 이미 그리스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하여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자들과 루소, 페스탈로치로 연결된다. 교육의 목표는 기계적인 사람이나 지식인을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전인(whole person)적 존재를 기르는 것이라 하였다. 전인적 사람들은 사랑하고 깊이 느끼며 그의 내적 자아를 확대하고 자아 교육의 과정을 계속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창조론은 인간 중심주의가 아니라 하나님, 인간, 자연과의 생명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하면 인간 사이에 불신과 반목이 생기고 인간 사이의 관계 상실이 자연을 황폐케 한다는 사실을 보게 되는 것이다. 땅이 인간에게 엉겅퀴와 들풀을 내어 인간이 하는 노동이 저주받는 노동이 되게 하고 반면에 인간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물을 보전하며 인간의 신뢰도가 창조질서를 회복하면 땅에서 강물이 흐르고 온갖 들판에서 과실이 맺는다는 것이 창조의 증언이며 이것이 성서의 증언이기도 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맥추절 감사 절기를 지키는 것은 땅이 자연적으로 소출을 낸 것에 대한 감사이고 이것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셨다는 징표로 믿었던 것이다. 홍수사건 이후 노아에게 새 문명을 명하신 하나님은 사람의 눈에서 억울한 눈물은 흘리게 하지 말 것과 동물을 피 채로 먹지 말도록 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형평성 못지않게 인간과 자연간의 정의도 역시 생태학에 있어 중요하다는 것이 이 또한 생명관계를 알게 하는 것이다. 감사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은혜의 고마움이다. 그리하여 감사의 마음은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감사는 감사해야 할 조건적인 이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감사는 사랑의 보답이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이 들어있는 온 공간과 시간의 전체를 지으신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예컨대 인간의 부모와 자식 간의 사이에는 아무 이유나 조건이 아닌 사랑의 관계이듯이 사랑의 관계이다. 그리하여 그럼으로 그 관계의 나타남은 감사와 은혜뿐이다.
​ ​그럼으로 감사하는 마음은 항상 조건반사적인 태도이다. 그렇다고 동물처럼 동물이 그의 환경에 적응하려고 후천적으로 가진 반사작용과 같은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과 같은 그런 조건반사가 아니라 정녕코 감사는 고마운 마음을 나타내는 인사하는 마음이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죄 사함을 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십자가 은혜가 바로 그것이다.'복 있는 자'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다. 이는 물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씨 (心根, 心相, 心情)를 알게 한다. 그리하여 복을 누리면 행복이 온다. 행복을 누릴(살면서 즐기는)줄 아는 자가 복을 불림(鍊鍛) 할 줄을 안다. 남의 가지고 있는 물질적 소유가 아니라 이미 내가 가진 것을 돌아보며 지금 이것에 누릴 줄 아는 자이다. 일의 성취도나 성공해서 얻으려는 행복이 아니라 주어진 삶의 현실에서 청빈(淸貧), 정결(貞潔), 순명(順命)을 누리며 삶이 풍성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복이 있는 자' 이다. 복은 어떤 목적에 이용되는 인적, 물적 근원인 세상의 자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원(資源)으로 만족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마음가짐이 중요함을 알게 한다. 산상수훈에서 복은 자기의 소유에서 오는 부유함이 아니라 사람의 됨됨(being)인 하나님의 자원에 있음을 안다. 그러므로 복이란 삶에서 삶을 누리는 좋고 만족한 마음의 현상에서 오는 기쁨과 즐거움을 알게 하고 행복은 그 생활의 만족과 삶의 보람을 느끼는 흐뭇한 상태에서 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예수의 산상수훈의 8복은 "복이 있는 자가 누구인가?"를 열거 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를 알게 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행복은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른다. 이러한 자는 생활의 만족과 삶의 보람을 느끼는 흐뭇한 상태에 있는 자를 '행복한 자'라 하는 것이다. 복이나 행복은 세상 것의 얻음이 아니라 이러한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나라(天國)가 채워지고 마음 거울로 그 나타남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산상수훈 8복에 이어 다음으로 구사하기를 예수께서는 즉시 이르시되 '너희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 되라'고 삶의 자리를 펼치신다. 이 수훈은 말씀만이 아니라 그리고 아주 귀중한 삶의 실제(實際) 생활에서 청빈, 정결, 순명을 하게 한다. 그리고 다시 이어서 삶의 규범으로 예수와 율법의 실제로서 구약의 옛 약속인 옛 율법을 완성케 하신 예수의 삶인 사랑의 새 율법으로 십자가로 친히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게 하여 이를 사랑으로 완성하게 하신다는 것도 여기에 피력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복은 삶이 새로워져야 하는 생활의 행위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에 기본적인 복과 행복이 있음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복 있는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요'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그리스도교의 창조질서는 바로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이러한 하나님의 자원(하나님의 형상)으로 복을 살아가는 삶을 알게 한다. 즉 하나님 중심적인 삶이 하나님의 자원의 복으로 사는 삶이 이루어지는 하나님나라인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세상의 자원으로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고 있음을 보게 한다. 말하자면 이 삶은 자기 목적을 위해, 자기 자원으로, 자기 방법으로 사는 마음의 상태를 알게 한다. 자기의 힘, 자기의 지혜, 지식, 재능, 능력, 부, 건강으로 세상에서 자기중심적인 지위를 위해 살고 있는 삶을 알게 한다. 여기에 반대로 시편기자는 '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144:15).라고 말한다. 왜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셨을까? 하는 이유를 엿 본다. 이는 하나님에게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이 에덴의 동산에서 처음 복 있는 삶을 살게 되었으나 사람은 범죄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어김으로 죄에 이르는 경위(涇渭)를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자연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몸담고 있는 환경 세계 전체이다. 그러나 자연이라는 그 개념은 시대와 민족에 따라 다르고 종교에 따라서도 다르다. 고대와 근대가 같을 수 없고 서양과 동양 간에도 차이가 난다. 흔히 넓은 의미로 자연을 논하는 데에 목적론적 자연관을 살펴보아 그 속에서 목적의 개념을 이해하려 한다. 옛날에는 하늘이 인류의 아버지이고 땅은 만물의 어머니라고 부르며 자연은 살아있는 거대한 생명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오늘날 자연은 그 신성함이 상실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자연과 어떻게 관계를 가져야 할지를 아는 것이다. 신학자 몰트만은 '내재적 초월'이란 개념을 사용하여 신의 창조와 자연의 진화를 종합한다. 비록 세계가 하나님으로부터 구별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세계 안에서 활동하고 계신다고 주장한다. 자연은 이용 가능한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공간이다.​ 그럼으로 은혜는 이유 없이 온다. ​무엇이든지 ​이 세상에는​영원한 것은 없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속에 간직된 사랑만은 언제까지나 마음속에 오래오래 깊이 간직되어 있다. 이 간직된 마음이 무엇인가? 이 간직된 사랑이 사라나는 것으로 감사를 알게 한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원본이기 때문이다. 고로 이것은 우리의 희망이요 아름다움이다. 그리하여 사랑은 맑고 깨끗하고 순수하기에 배려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봉사와 희생을 자처하는 것이다. 바로 이 사랑실현에 감사를 잘 살펴서 간직하는 것이 감사의 갈무리이다. 그리하여 세월과 때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창조질서를 통하여 이 땅위서 이루어 가고 있든 것이다. 이를 알고 믿음의 생활을 하면 세상에서 사는 삶은 불평이나 불만은 없어 질 것이다. 변하지 않는 구원의 감격과 기쁨은 날마다 새로운 감사를 알게 된다. 이는 이 세상의 한날 괴로움을 이기고 인내할만한 충분한 까닭을 알게 한다. 이 세상의 감의 이유나 조건들은 변할 수 있지만 그 구원의 감사는 믿는 자 누구에게든지 공평한 것이며 살아가는 날 동안 주어도 드려도 한없이 부족한 은혜로운 감격에 감사하는 마음뿐이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교의 복된 “복 있는 자”이다. 이것을 알게 하는 것이 복된 복음이다.  

시(詩)​ "가을은 알게 하는가?" 泉水(샘물)

샘물(泉水) 배 성 산
 
 
가을은 가을인가 산마다 들마다 푸른 하늘
황금물결 그윽한 향기 정말 가을인가 보다
누구의 말림도 수고도 없이 가을은 오는가!

화려한 단풍과 떨어지는 나무잎에서
우수(憂愁)의 마음이 물들어가나 보다
가랑잎 구르는 소리에 해가 기우는가!

 
귀뚜라미 우는 소리에 마음이 몸에 젖어
새삼스레 연약함을 느끼게 하는가 보다
가을은 상념(想念)으로 계절을 알게 하는가!

한 해의 익은 곡식과 과일을 거두어들임은
풍요한 온갖 생명을 보게 하는 것인가 보다
이 생명 다하여서 저 생명을 알게 하는가!

가야 할 시간 돌아 올 때를 기다림에 서서
흐르는 세월은 눈물을 헤프게 하는가 보다
이른바 "가을은 알게 하는가!"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

한가위 감사의 갈무리
역대지상16:23,갈라디아6:7,고전3:6-7,고후9:6
2017년 10월 1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심은 것을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세상의 이치를 알게 한다. 이것은 진리로서 자연의 길이요 질서요 생명이 된다. 이는 "심는 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터득 하려면 먼저 심어야 나중에 거두게 하는 것을 알게 한다. 또한 여기에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먼저 주어야 함도 알게 한다. 그리고 씨를 뿌리기 전에는 반드시 밭을 갈아야 하기에 씨를 뿌리려면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 씨를 뿌려 거두려면 반드시 때가 지나야 거둘 수 있다는 것도 알게 하지만 이는 어떤 씨앗도 뿌린 후 곧 바로 거둘 수 없다는 것도 알게 하는 것이다. 또한 뿌린 씨가 전부 열매가 될 수는 없다는 것도 알게 하며 모든 일에 이익을 얻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말라는 것도 알게 한다. 그러나 뿌린 것 보다는 더 많이 거둔다는 것을 알게 한다. 이는 모든 씨앗 에서 수확을 얻지 못해도 결국 뿌리는 것 보다는 많이 거둔다는 것을 이치를 깨닫게 한다. 그리고 농사의 법칙은 콩 심는데 콩 나고, 팥 심는데 팥 난다는 이치도 알게 한다. 종자대로 심으면 종자대로 난다. 이것은 소가 돼지를 낳을 수 없듯이 결국 소는 소를 낳고 돼지는 돼지를 낳는다는 것을 깨우치게 한다. 또한 심는 자는 반드시 그 종자를 다음 기회를 갖기 위해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도 주의 하여 알게 한다. 이는 다음 수확을 위해 씨앗 중 일부는 다시 뿌릴 수 있게 종자로 남겨 두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한다. 이렇게 세상만사의 이치가 '심는 대로 거둔다' 사실로 진리인 된다. 이는 반드시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종을 치는데 소리가 나지 않는 종은 하나도 없다'는 것도 알게 한다. "감사의 갈무리"는 심은 것을 그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갈무리하는 것이요 심는 것만큼 이루어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께 우리가 어떻게 갈무리하여야 함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감사로 하늘의 씨(복음)를 받는 하나님의 몸으로 사람의 인내로 잘 심는 자가 되어 하늘의 감사를 잘 챙기어 간직함으로 "감사의 갈무리"를 알게 한다. 때가 이르면,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이므로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갈무리'의 의미는 모든 것을 잘 거두어 돌보는 것이다. 이는 창조질서 순응에 대한 감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4계절, 우주 천체의 지속적인 운행은 창조질서의 순응에 대한 이치로 되어진다. 원래 창조질서에 순응 하는 관계를 알게 한다. 이 회복은 말씀 안에서 이루어진다. 세계교회들의 추수감사절은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감사절에 연유하면서 자기민족의 역사전통과 문화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고 접목하여 창조질서에 순응하는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풍요로움과 넉넉함을 전하는 것은 풍요로운 재물에 대한 현혹됨이 아니고 이렇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늘 기억하게 하는 창조보전을 위한 감사인 것이다. 이렇게 창조질서를 지키고 생명의 감사를 아는 것은 우리나라의 한가위 명절이다. 그리하여 한가위는 우리의 삶과 마음을 나누고 넉넉하고 여유롭게 한다. 느긋하면서도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하는 스스로 의 감사를 알게 한다. 이는 "한가위가 감사를 아는 명절"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렇게 한국의 한가위와 구약성서의 초막절은 너무나 공통점이 같다. 초막절은 유대 달력으로 티쉬리월로 7월15일 보름날인데 한국의 한가위도 음력으로 8월 15일이다. 달만 다르지 날짜는 보름으로 항상 같은 것이다. 달밤을 즐기는 행사도 서로 같다. 그리고 조상을 찾아 경배하며 하늘에 감사를 드리는 것도 같다. 초막절에는 세계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조국 땅에 있는 성전을 향해 누구나 순례를 하며 조국과 조상을 기억하는 전통도 같다. 유대인들의 쑤카와 한국의 한가위가 추수한 곡식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도 같은 것이다. 원래 우리나라 전통문화는 지배문화가 아니고 백성의 문화였다. 이 문화는 하늘과 땅, 신령과 인간이 하나로 융합되어 새로운 생명과 문화를 창조하는 원초적인 신앙적인 풍습이었음을 알게 한다. 이렇게 성서는 우리에게 자연속에 깃들인 하나님의 생명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치 못할지니라'고 사도 바울은 말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본성 곧 보이지 않는 신적 본질과 영원하신 능력 은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사랑과 영원성이 창조세계인 자연에 나타나 보인다는 의미로 현시(顯示)되어 있다. 바울은 하나님과 우주 만물과의 깊은 관계 즉 불가분의 본질적 관계를 다음의 말로 표현한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 주에게로 돌아감이라'고 한다. 하나님과 만물과의 신비한 관계를 깊이 묵상하고 사색하고 영적 직관과 기도와 체험으로 알아 낸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기독교의 영성을 풍부하게 해준 자연에서 영감 받은 자들임을 우리는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기독교의 영성이 성서 전반에 자연 속에서 흐르고 있음을 알게 한다. 여기 하나님과 만물과의 신비한 관계를 깊이 통찰하고 알게 해준 이가 현대신학의 과정신학자로 화이트헤드(A.N. Whitehead)를 알게 한다. 그는 하나님의 본성을 크게 두 가지로 본다. 하나는 이 세상 만물과 직접 관련이 없는 초월성 혹은 '원초적 본성'이라고 말하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이 우주만물과 직접 관계된 제2 의 본성으로써 '파생적 본성' 혹은 '물리적 본성'이라 한다. 그는 이 세계 운주 만물은 단순히 하나님이 창조해 낸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물리적 본성으로서 자신의 본성의 일환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우주는 하느님의 몸이라는 것이다. 유비적으로 말하면 사람에게 몸과 마음이 있듯이 하나님에게도 마음 곧 영적 측면과 몸에 해당하는 물리적 측면이 있는데 이 세상 우주 만물 곧 자연은 그 만큼 하나님과 직접적인 혹은 근원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화이트헤드는 사도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신성이 그의 지으신 만물에 보여졌다고 하는 말과 같은 것이다. 행복은 감사의 나무에 피는 꽃이요, 불행은 불평불만의 나무에 돋는 독버섯이다.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힘써야 한다. 신앙은 은혜에 보답하는 생활을 역설한다. 감사하는 마음의 훈련은 인생의 중요한 훈련의 하나이다. 너무 풍족한 생활을 하면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버리기가 쉽다. 무슨 일이나 쉽게 이루어지면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가 힘들다. 고생 끝에 목적을 달성해야 감사하는 마음을 느낀다. 추위에 떨어본 사람이 태양의 감사함을 느낀다. 굶주림에 시달린 사람이 밥 한 그릇의 감사함을 갖는다. 갈증의 고통을 겪는 사람이 시원한 물 한 그릇의 감사를 갖는다. 인정에 굶주린 사람이 사랑의 소중함을 느끼는 것이다. 기계에 기름을 치면 부드럽게 돌아가는 것처럼 인간관계에 감사라는 기름을 치면 모든 일이 평화와 기쁨 속에서 부드럽게 돌아간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감사라는 감정을 심어 주셨다. 우리는 이 감정을 키우고 확대시키고 발전시켜야 한다. 빛깔을 바로 분간 하는 능력이 없는 사람을 색맹이라고 한다. 감사해야 할 때 감사하는 마음을 못 갖는 것은 일종의 도덕적 색맹환자이다. 자기 인생에 대하여 아무 것도 감사할 것이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른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요, 옅은 생각 이다. 누구나 인생에 있어 감사할 것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찾아야 한다. 병원 환자를 볼 때 자신의 건강함을 감사하자. 앞 못 보는 장애인을 볼 때 나의 두 눈 을 감사하자. 인생은 결코 외로운 것도 아니요, 불행한 것도 아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항상 마음속에 지닌다면 인생은 언제나 즐거운 것이요, 기쁨과 보람이 있는 것이다. 허무주의자나 염세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인생은 그렇게 허무 한 것도 아니요, 괴롭기만 한 것도 아니다. 人間到處有靑山이라고 했다. 감사의 눈으로 인생을 바라보라. 인생은 기쁨의 샘터요, 행복의 화원이 될 수 있다. 인생은 성실하게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요, 열심히 노력하고 생활한 만큼 보람 이 있는 것이다. 비록 어두움과 절망의 골짜기로 지날 때에도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감사의 밝은 태양을 가슴속에 지니고 기쁨의 인생을 기도로써 살아가자.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감사는 하나님의 뜻이다. 진정한 감사는 영혼에 더 큰 감사의 햇살이 비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은혜를 아는 것은 감사의 덕이다. 감사는 인간의 본성이다. 새가 노래함같이 인간은 감사한다. 감사는 하느님의 창조적 사랑에 대한 인간 의 본능적 반응이다. 강물이 바다로 흘러드는 것과 같다. 씨가 햇빛과 비를 받아 자람같이 우리의 감사도 경험 속에서 자란다. 역대 사도들은 고난 중에도 감사 했다. 독일에서 많이 부르는 노래는 "이제 우리는 다 하나님께 감사하자"이다. 자연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이 말은 눈에 보이는 것은 믿을 수 있다는 의미를 갖게 한다. 인간의 존재도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존재하는 것 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자연과 인간이 생존하는 것을 알게 한다. 존재하는 것은 때에 따라 변화하기에 천하만사가 기한이 있어 가을에는 철을 따라 산과 들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게 한다. 지금 우리는 주어진 공간에서 제 자리를 지키면서 철을 따라 처한 환경에서 묵묵히 한 생명으로 당당하고 떳떳하게 자라면서 변화하여 세월을 따른다. 그 모습은 다양한 형태와 아름다운 빛깔을 자아내면서 꽃과 나무들로 계곡에 처하여도 기다림과 외로움을 감당하며 생명은 그 무엇이라도 이미 그 자체로서 더 이상 아름다움의 자태를 들어내고 자연에게서 수확한 많은 영글어 가는 열매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를 알게 한다. 이렇게 성서의 가르침이 형성된 것은 세상의 본질에 대한 명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연을 통해서 만사를 알게 하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보고 감사 하면서도 세월에 따른 시절도 보며 우수의 마음으로 상념케 한다. 가을과 함께 맞는 수확의 감사는 설날과 함께 한국의 2대 명절 중의 하나인 한가위(秋夕)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너희의 소산을 먹을 때 너희에게 그것을 주 신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명하신 추수의 감사를 생각하여 본다. 자연은 하나님의 창조이다. 자연이 존재하기에 인간에게 절기와 축제가 있다. 그 절기를 따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는 감사로 그 축제를 갖는 것이다. 인간은 하 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을 통해서 감사의 갈무리로 축제를 하는 것이다.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