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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설교 블러그 - 샘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설교

다음 세대가 읽도록 주님께서 하신 일을 기록하여라. 아직 창조되지 않은 백성이, 그것을 읽고 주님을 찬양하도록 하여라.(시 1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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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의미
창세기1:26-28,고후5:16-17,빌립보서1:20
2018년 7월 22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삶을 사는 이유를 여러 가지로 생각하며 살아간다. 이렇게 그 삶은 생존을 위해 사는지? 존재를 위해 사는지를 물으며 살아간다. 자기만을 위해 사는 생존자도 있고 사색하며 삶에 존재의 가치에 의미를 두고 사는 자도 있음을 본다. 여기에 빌립은 그의 삶에 고백이 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아무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온전히 담대해져서 살든지 죽든지 전과 같이 지금도 내 몸에서 존귀함을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 인간창조의 텍스트는 일차적으로 인간에 대하여 말하기 보다는 사람으로 창조에 대하여 말하고 있음에 유의한다. 생각해 보면 하느님은 사람을 자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하심에 유의한다. 창조주 하느님은 사람이 자신과 상응하게 피조자로 지으신 이유로 하느님과 상응하는 이유로 생명을 다스려 그 삶을 영유하도록 친히 아버지가 되시어 창조자와 피조자 사이에서 무엇인가? 일어 날 수 있도록 관계된 창조임을 알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형상은 인간학적 개념이기 전에 신학적 개념임을 알아야 한다. 이는 사람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하기 전에 자기의 형상을 스스로 만들고 여기에 특별한 관계를 지닌 자기의 형상을 스스로 만들고 이것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하느님은 스스로 아버지이심에 특별한 관계를 맺는 하느님에 관하여 무엇인가? 말하려 하심에 주목하게 한다. 하느님과의 관계로서 인간의 관계를 의도함에 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의도는 인간이 세상에서 삶을 살려 한다면 하느님의 아버지에게서 창조자의 뜻을 살펴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 살아야 함을 알게 한다. 여기에 우리 인간은 무엇을 위해 왜? 살아야 함을 알게 한다. 인간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가? 함에 주시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삶의 생존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넌지시 알게 한다. 여기에 삶의 가치를 알고 “존재의 의미”로 그 관계된 의미와 이유를 알게 한다. 하느님의 형상은 사람과의 관계로 하느님 아버지 되심은 같은 형상으로 인간의 삶과 연계되어 있음을 믿게 한다. 하느님은 인간이 땅위에 있는 그의 형상과 영광이 되게 하는 삶으로 인간과의 관계를 맺는다. 예컨대 인간의 본질은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이러한 관계로 부터 생겨나며 이 관계에 필히 책임을 묻는다는 것을 알게 한다. 예컨대 하느님은 모든 인간을 자신과 상응하도록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서 무엇인지 일어 날 수 있도록 관계된 창조임을 알게 한다. 곧 이는 창조함을 받은 사람에게 하느님의 형상은 인간학적 개념이기에 앞서 신학적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는 곧 창조되는 인간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하기 전에 자기의 형상을 스스로 만들고 그것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하느님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말하려 함에 있음을 알게 한다. 이는 인간의 본질은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이러한 관계로 부터 생겨나며 이 관계에 반드시 책임을 추궁한다는 현실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바울사도는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죽는다” (고후15:31) 고 한다. 종교 개혁자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매일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는 끊임없는 ‘자기 갱신’을 의미한다. “개신교회”를 라틴어는 “ecclesia semper reformana”라고 하는데 이는 ‘항상 개혁하는 교회’라는 의미를 갖는다. 과거의 교회사를 보면 개신교회가 16세기의 개혁정신을 잊어버리고 현실에 안주 하거나 과거 지향적이 될 때 그 교회는 ‘개혁 교회가 아니었음을 고백하게 한다. 이는 삶이 주어진 현상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임을 알게 한다. 그리고 그 사건은 계속적으로 미래가 오고 있는 삶으로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함에 주목해야 한다. 이렇게 ‘존재의 의미’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완성되어 간다는 사실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삶은 변화와 성숙의 과정으로 인간의 육체적 생리적 성장단계에서 뿐만 아니라 정신적, 영적 성장관계에서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 삶에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살피건 데 믿음의 경험을 통해 거듭 나는 것(중생)도 마찬가지임을 알게 한다. 고후5:17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근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라 함에 주목한다. 흔히 사람들은 어느 한 사람의 존재를 그가 낳은 것에 대한 운명을 그의 출신 성분과 어릴 때 그 행실 하나로 판단하는 것에 대하여 그리스도교의 복음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 그리스도교는 ‘거듭남’(중생)으로 존재하는 행실에 바울사도의 신앙의 고백이요 증언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바울사도는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죽는다”(고전15:31)고 했으며 종교개혁자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매일 세례를 받아야 함에 주목하게 한다. “그리스도인의 존재”는 끊임없는 ‘자기 갱신’으로 삶의 의미로 존재한다. 여기서 귀중한 의미는 ‘삶’은 현상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으로 “존재의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삶은 현상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요한1서4:13-16
2018년 7월 15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삶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경험해야 할 신비이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믿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경험되어지는 은총이다. 인간은 경험되어지는 은총으로 그 삶을 성서에서 배우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수난)으로 이끌어 가는 잠재적 그리스도로 구원의 자리임을 믿음으로 고백하게 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창조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오늘의 본문 요지에 근거하여 잘 드러난다. 사람은 원래 하느님의 피조물이다. 하느님이 창조자이심으로 그 하느님은 사람의 궁극적인 실재이시기에 그 삶의 모두를 거두시는 생명의 궁극적인 관심이 되시며 그 삶의 존재가 되는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삶을 사는 과정에서 사람은 언제나 그 궁극적인 실재 앞에 서 계시는 하느님은 항상 임재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최고의 가치가 자기에게서 그 가능을 보아야 한다. 오늘날 세계경제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실패로 인하여 전 지구적 가난에 직면하여 있다. 특히 서민경제의 파탄소식이 지구촌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다. 우리나라의 서민들의 삶도 생활자금을 대출하여 살 수 밖에 없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경제패턴으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언론 보도를 통하여 듣게 된다. 악순환이 반복되는 경제패턴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사람들에게 미래의 희망을 빼앗아 간다는 데 있다. 이러한 현실적 삶에 대하여 잠언의 지혜는 해결의 실마리를 말씀해 주고 있다. "내 아들아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여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혔느니라 내 아들아 네가 네 이웃의 손에 빠졌은즉 이같이 하라 너는 곧 가서 겸손히 네 이웃에게 간구하여 스스로 구원하되…….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인간은 스스로 삶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다. 이를 하나님의 지혜의 관점에서 접근할 때 그 해결의 실마리를 알게 한다. “썩을 이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이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그 때에 이렇게 거룩한 성서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었다”는 (고전15:54-58) 말씀을 얻게 된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이렇게 최고의 가치가 자기에게서 그 가능을 보아야 한다. 
삶에 대하여 진지한 관심과 관점을 가지고 접근하면 인간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문제는 진지하게 인간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접근하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다. 현대인은 뉴스와 신문을 통하여 전 지구적 가난과 전쟁과 분쟁과 갈등의 소식을 듣지만 남의 이야기로 들일 뿐이다. 누군가 해결하겠지 하고 생각하며 지나간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남이란 없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본연의 뜻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1890년 말 대기근이 러시아를 덮쳤을 때 여러 지역을 다니며 가난한 사람을 돕고 자신의 재산을 내놓는 등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삶에서 실천한 작가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문학을 통해 사회의 병폐를 치유하고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는 ‘톨스토이주의’가 잘 드러나는 그의 후기 작품이다. 동화처럼 쉽고 재미있게 읽히지만 곳곳에 숨겨진 읽을수록 마음이 따뜻해지고 편안해지는 삶의 지혜는 세계적 문호 톨스토이의 위대함을 다시금 느끼게 해준다. 이를 포함한 10편의 동화 같은 단편들은 간명한 이야기이기에 선명하게 보이는 선과 악으로 우리의 복잡한 현실을 더 쉽게 돌아볼 수 있는 힘을 가진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최고의 가치가 자기에게서 그 가능을 보아야 한다.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

교회는 계속 개신(改新)한다.
계시록18:4-8,로마서1:17
2018년 7월 8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종교개혁은 역사적 유물도 아니고 박물관의 전시물도 아니라 그 개혁은 역사적으로 이어져 왔고 지금도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중세 교회가 그리스도교다운 자기 모습을 잃고 헤맬 때 개신(改新)을 외치며 개혁의 분신으로 자처하여 '개신교(改新敎Protestant)'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고침으로 개신(改新)한 기독교를 그리스도교라 한다. '개혁된 교회(Reformed Church)'를 알기 위해서는 첫 번은 어디이고? 역사적으로 교회가 개혁된 때는 언제인가? 그리고 개혁된 내용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질문에 대한 전통적인 입장과 답변은 ''16, 17세기로 돌아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당시 거짓된 신앙적 열심과 거짓된 신학, 그리고 성서의 증거로부터 심각하게 멀어진 거짓된 교회의 모습들로부터 성서가 말하는 참된 구원과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를 성서의 증거를 따라 잘 드러내었던 시기였음을 알게 한다. 이 때가 '오직 성서로만이' 하느님의 말씀의 뜻을 알고 행함을 얻는 지혜를 새롭게 함이었다. 여기에 칼빈을 비롯한 활동이 역사상 돋보이던 시대였다. 바로 이를 교회가 역사상 개혁된 시기였다. 지금에 와서 '교회’가 이제는 개혁의 대상이 되고 말았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 교회는 제2의 신앙개혁이 필요하다는 말을 이구동성으로 듣는다. 여기에 하늘의 음성을 듣는다. '하느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납니다. 이 일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납니다. 이것은 성서에 기록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고한 본문의 말씀을 알게 합니다. 따라서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 이다'는 바울의 고백을 듣게 하며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함이 개신교의 이름으로 '개혁된 교회'의 모습을 보게 하는 것임을 알게 한다.
 1960년대 이후 한국사회는 산업화와 도시화로 사회와 교회는 엄청난 성장을 하여왔다. 이런 고속성장이 한국사회와 함께 1세기 반 동안 선교의 연혁(沿革)에서 한국교회는 성숙된 발전의 모습에서 역사상 유례없는 외적인 급성장으로 발전해 왔다. 한국사회의 급성장과 성장주의 신화는 성공주의와 실용주의에 편승해 가면서 교회도 그대로 답습하여 부정적인 현상들은 교회내의 심각한 부작용들과 영적인 질병들을 가져왔다. 이로 인해 위기상황은 한국교회에 대사회적 역할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으며 교회의 영적각성과 개혁이 시급하게 필요한 현실에 처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나 이를 알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의 내부 현실의 신앙생활에서 보면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에 대한 이해와 그 권위가 생활의 삶에서 말씀이 포기한 듯 한 믿음을 보는 것이다. 예로서 신앙고백이나 설교 강단은 하느님의 말씀이 실제적인 생활에서 말씀은 침묵하고 하느님이 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은 땅에서 이루어지는 기운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또한 성서에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신학자 개인의 학문적 입장이 더 높은 권위를 행사한 면도 보는 것이다. 교파성과 정치성으로 일부 교회는 총회나 노회의 권한이 더 크게 인정 되어 교파는 날로 늘어나고 있는 셈이며 신학교는 학력인가도 소용없는 나름의 신앙교육집단을 만들어 자기들의 세력을 부풀리는 데만 관심하고 목회자의 자질은 상관없이 수의 힘으로 목회자의 능력만이 인정하여 자격 없는 처지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으로 과시하려 드는 한국교회는 물량적이고 배금주의에 빠져 신학이 없는 우매신앙(愚昧信仰)과 샤머니즘으로 우쭐되고 있다. 그리하여 교회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망각하고 한 예배 장소를 빌려 거기서 포교하는 역할로 수를 채우면 세칭(世稱) 성공하는 교회가 되어있다. 교회가 예배, 교육, 선교, 구제, 봉사와, 친교를 통해 세상을 섬기고 세상을 하느님과 화해하게 하는 진리의 공동체라는 구실을 갖추지 못하는 현실이 되고 있다. 이것은 신앙공동체보다는 조직이나 기획과 운영의 조직력을 과시하는 집단이기주의의 모임으로 큰 성공으로 교회발전을 과시하려는 경향이 교회성장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인 인식이 되어 있음을 알게 한다. 오늘의 가정이 붕괴되고 경제정의가 부재하여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와의 사이에 상대적 박탈감으로 빈부격차의 갈등현상을 보게 되는 것에 대한 교회의 아픔은 하나도 없다. 이러한 윤리적 삶의 실패 이면에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삶의 목표가 거룩한 생활을 위해 하느님께 영광 돌리기 보다는 오히려 개인의 인기와 명예와 외적 성공이나 물질적 축복을 추구하는데 더 관심이 크다는 것을 알게 한다.
 신약성서에서 교회는 세 가지 권위에 대하여 말한다. 첫 번은 구약성서와 예수님을 보고 들은 증인들인 사도들과 구약성서와 사도들에게 그 나름대로 권위를 부여해 준 최종적인 권위 즉 주님 이 세 가지 권위는 모두 하느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단지 하느님의 말씀을 증거 할 뿐만 아니라, 그 분이 곧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서 그 권위들 간에 차이점이 존재함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기에 그것을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분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이 그대로 옮겨 하느님 자신의 말씀이 되게 함을 보여 주신다. 비유하면 하느님의 말씀은 교회의 건축과 관련되어 그리스도와 그리고 사도들을 위해 적용되었다. 이 사도들의 말씀은 교회라고 하는 건축물의 기초가 된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정초하는 교회의 원초 대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원초적인 말씀, 하느님 자신의 말씀은 사도들과 그들의 제자들에 의해 구두로 전래되었다가 1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부분적으로 문서적 형태를 취하고 이 문서들은 설교문이나 편지라고 하는 문학적 형식을 빌리면서 여전히 그 원래적인 구두적 형태를 보여 주고 있다. 2000년경 신약성서의 케논은 최소한 21권으로 구성되다가 4세기 후반에는 오늘날의 27권의 분량을 일반적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주목하는 것은 비록 교회가 성서냐 아니면 전통이냐의 양자 중 하나를 선택하는 종교개혁의 정신에서 출발하지 않고 ‘이’ 전통이냐 아니면 ‘저’ 전통이냐 양자택일에서 출발하긴 했어도 케논 형성을 통하여 교회는 근본적으로 '오직 성서만'으로 원리를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성서는 모든 신학의 기본적이고 첫째 되는 자료요 그 논리 구조의 표준이 될 뿐만 아니라 성서에 대한 어떤 이해가 곧 신학의 방향을 결정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종교개혁이래 교회의 모든 투쟁은 한 마디로 성서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온 것이다. 우리 프로테스탄 교회는 성서를 권위의 최상의 자리에 놓는다는 점을 알게 한다. 그럼으로 교회의 전통은 교리가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이어야 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 같은 종교개혁의 원리는 중세사회로부터 근세사회로의 길을 열어 보여 주었으며 신, 구(新舊)간의 종교전쟁을 거치면서 신앙생활이 생활윤리로 그 강조점이 바뀌어 가면서 차츰 가톨릭과 신교의 신앙하는 면이 오늘에 와서는 그 인식이 같아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는 지금 역사적으로 개혁되는 때와 개혁의 주체로서 정체성을 망각하고 개혁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을 알아야 한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많은 문제점들을 보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발견하고 지적하는 데에 머무르면 아니 된다. 교회는 사회를 보는 배타성에서 벗어나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의 책임을 다하는 하느님나라 구현을 이루어야 한다. 종교개혁은 성서를 제대로 알고(오직 성서로 만) 하느님의 뜻을 깨달아 (오직 믿음으로 만) 그것을 몸소 실행할 때 종교개혁이 가능하였음을 오늘에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성서말씀에는 힘이 생기고 개혁은 성서에 믿음으로 반응할 때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종교개혁은 인간의 전통을 따르는 행위를 포기하고 오직 성서를 따라 살아가는 믿음의 순종을 통하여 발생한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은 오직 성서(말씀)를 기준으로 삼아 전통을 타파할 때 발생한다. 개혁된 교회는 이미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 연결되어 있는 전체 역사 속에 있는 신실한 교회를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이미 개혁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역사 속에서 개혁된 교회는 주의 나라가 다시 온전하게 임하실 때까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16,17세기의 교회와 그들의 신앙고백의 의미는 교회가 항상 이미 역사 속에서 이루신 개혁된 내용 안에서 개혁되어 가는 개신의 과정이었다. '오직 성서의 말씀만이' , '오직 믿음으로 만'이 계속적인 개신(改新)하는 신앙이다. 그리하여 개혁의 주체와 개혁의 대상과 개혁의 내용의 고백은 그리스도인의 힘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계속 이렇게 종교개혁과 같이 역사적으로 참된 “교회는 계속 개신한다”는 지표로 삼는 신앙으로 교회는 먼저 이를 실행해 알리어 주어야 한다. 
 우리는 신앙한다. 우주적 보편의 교회가 역사 속에서 개혁된 것은 율법과 계시의 내용을 완성하시며 자기 백성 안에 친히 임마누엘 하시고 온 교회의 머리가 되시어 교회를 유기적인 한 몸으로 연결하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만 교회는 역사적으로 하느님의 계획된 개신으로 신앙함을 아는 것이다. 교회는 계속적인 개신(改新)으로 신앙함에 있다.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